14/08/2026
1970년대 초,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백사장 사진과 조선소 건설 계획을 들고 영국으로 건너간 한 한국인이 있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조선소를 지을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과 차관 도입을 추진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조선소도 없는 기업에 무엇을 믿고 거액을 빌려주겠느냐는 냉정한 반응이 돌아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정 회장은 바클레이스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영국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정 회장은 지폐 속 거북선을 가리키며 우리 민족이 1500년대부터 뛰어난 배를 만들었던 역사를 이야기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한국인의 기술적 잠재력과 도전정신만큼은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전달한 것이다.
이 대담하고도 기지 넘치는 일화는 단순한 배짱의 결과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 위의 가능성을 상대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로 바꿔낸 정 회장 특유의 통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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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권 속 거북선은 한국인의 기술적 잠재력을 상징하는 하나의 스토리가 되었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는 훗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조선 강국으로 도약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산업 현장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전국 각지의 공장과 연구소에는 제2, 제3의 정주영 회장처럼 묵묵히 기술 혁신을 이루어가는 수많은 기업가가 있다. 누구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해외 유수의 바이어들이 주목할 만한 제품을 만들어내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한민국 산업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강소기업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백사장’에 머물러 있다.
기술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그 기술의 가치와 가능성을 시장과 대중, 나아가 글로벌 파트너들에게 어떻게 보여주고 설득해야 할지 몰라 어려움을 겪는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도 자신만의 ‘거북선 지폐’를 갖지 못해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기술의 평준화 시대다.
이제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만큼이나 ‘우리의 기술이 세상에 어떤 변화와 가치를 만들어내는가’를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다.
냉정한 시장과 투자자,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단단한 기술력이라는 뼈대 위에 입혀진 명확하고 가슴 뛰는 ‘브랜드 스토리’다.
정주영 회장이 꺼내든 거북선은 단순히 지폐에 그려진 옛 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이자 기술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대한민국 산업이 나아갈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다.
지금 우리 기업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다르지 않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시장의 가치로 전환되기 어렵다. 기업이 축적해 온 기술자산과 임직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시장의 신뢰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만의 철학과 진정성을 담아낸 단 하나의 스토리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에서 세계적인 조선소를 꿈꾸었던 위대한 도전처럼, 대한민국의 수많은 강소기업이 자신만의 ‘거북선’을 가슴에 품고 세상이라는 무대로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위대한 기술은 위대한 스토리를 만날 때 비로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